기독교 장례식을 겪어보면서…

By | 2007/09/01

최근 저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렀습니다.

교회를 다니시는 외삼촌의 권유에 따라

외할아버지는 생전에 잠시 교회를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저희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는 전통 방식으로 집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상복을 입고, 매번 절을 하며,

상주는 계속해서 곡소리를 내면서 조문객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때 그 모습을 보고 장례식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독교식이라서

상주는 양복을 입고 팔에 완장을 찼습니다.

상주는 곡소리를 하지 않았고,

조문객들에게도 절 대신 헌화와 목례를 권장하였습니다.

물론 글만 그렇지 조문객이 원하시는 대로 권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두 번 반을 절하고 상주와 맞절하셨습니다.

(저는 양복이 없어서인지 완장을 하지 않고 두루마기를 걸쳤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사람들이 찾아와서

빈소에서 예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빈소에서 고인의 명복을 비는 예배를 보니

상당히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유교식의 장례를 보고 배웠는데,

그렇지 않은 장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발인을 하기 전에 예배가 있었습니다.

관이 떠나는 의식인지라 저도 그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찬송가는 잘 부르지 못하였기에 귀로 듣고 눈으로 가사만 보았습니다.

 

예배에 목사의 성경봉독이 있었습니다.

꺼내온 성경 문구는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26절의 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서 두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왜 마지막에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었을까?’

그래서 살펴보니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는 말을 적은 글이더군요.

요한복음 11장 25절 ~ 37절 (신약 P 166)

 

제가 성경을 배운지 오래되어서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부활하였습니다.

그 때 누구와 만났는데, 그 자가 사람들에게 부활을 알렸다고 기억합니다.

부활할 때 만난 사람에게 믿느냐고 묻는 말인 듯싶습니다.

 

궁금증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만약 ‘믿는다.’라고 한다면

‘나는 부활이요’부터 ‘아니하리니’까지의 말을 믿는다는 뜻이니

그 문장 속에 적혀진 말대로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요??

불신지옥인가요??

(그러고보니 해당 문구는 성경 어디서 나오는건가요??)

 

이렇게 성경봉독을 하고나서

말씀선포라는 차례가 있었습니다.

목사가 여러 얘기를 하였는데,

여기서도 세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첫 째로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운 것이 생각났습니다.

‘기독교는 차별적인 사랑이고,

유교는 사람을 사랑하고,

불교는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

따라서 사랑의 크기를 보면 기독교 < 유교 < 불교이다.’

위 내용을 배울 때는 별 생각 없이 느꼈는데,

논어를 읽으면서 유교는 인간중심의 종교(?)라는 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기독교는 인간에 차별을 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피랍된 사람들을 얘기하면서

탈레반을 악인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아마 그 유명한 ‘불신지옥’인 듯싶었습니다.

그 때 ‘아.. 이것이 차별적인 사랑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둘 째로 ‘믿습니다.’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천국에 가신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고인이 되신 할아버지가 하나님에게 돌아가

천국으로 간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

어떤 유언을 남기셨는지도 모른다면서

어떻게 말씀하셨을 것이라 말하고

마지막에는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믿는다는 것.

 

위에서 얘기하는 ‘믿습니다.’의 의미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짐작하여 의심하지 않는 점이 같은 듯싶으면서도

성경이라는 근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른 듯싶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고인을 떠나보내는 자리인지

선교를 하는 자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설교 중간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고 찬송가를 부를 때 다시 들어갔습니다.

원래 예배라는 것이 이런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의문이 많았습니다만,

할아버지가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바라는

저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고마운 마음으로 찾아오셨기에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가 직접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고인을 떠나보내면서 좋은 곳으로 가기를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은

기독교식이든 불교식이든 전통방식이든

다 똑같은 듯싶습니다.^^

 

PS

인터넷 상에서 많은 분들이

기독교와 개신교, 천주교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차이점을 저는 정확히 모르기에

분리하여서 얘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사실 친척 분 중

교회 다니시는 분,

성당 다니시는 분,

절에 다니시는 분,

전통을 중요시 하시는 분 등

많은 분들이 계시는지라

‘딱 이것이다.’라고 구분하지 못하는 점을 양해바랍니다.

 

PS2

목사의 설교 중

아프가니스탄 피랍된 분들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 때 조금 황당한 점이 있었는데,

어떤 분이 웃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후에 찬송가를 따라 부르시더군요.

같은 교회 속에서도 다른 많은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비판할 때

싸잡아 하나로 보아 나쁘게 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번에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8 thoughts on “기독교 장례식을 겪어보면서…

  1. 민트

    저도 잠시 교회를 다녔는데(호주에서) 호주 교회도 크게 다르진 않더군요.
    개척교회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같은 교회 울타리 안 사람들끼리만 사랑하고 아껴주고 그렇더군요. 그리고 그 중에 한 명, 제 친구는 자기는 교회 다니는 교인만이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한다고.. 그 말듣고 가만 보니 이 친구가 교인들과 비교인들과 이야기나 생활할 때 마음의 벽을 두는게 보이기도 하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 중에 비교인은 한명도 없더군요..다른 교회를 다니더라도 어쨌든 교인. 그걸 느끼고 꽤 기분이 나빠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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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NoSyu

    /사바욘의_단_울휀스/
    오랜만입니다.^^
    그렇군요.
    같은 이름 아래 있지만 60억 인구가 믿는 60억개의 종교..^^

    Reply
  3. NoSyu

    /민트/
    호주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군요.;;;
    역시 기독교는 차별적인 사랑이 맞는 듯….

    http://nosyu.pe.kr/wordpress/1033
    위의 글과 관련해서
    그 친구는 보는 사람이 교회인이라
    상당히 좁은 시각을 가질 위험이 있지 않을까하는
    위험한 추측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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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나그네

    싸잡아 보는 것, 즉 편견만큼 사람의 분별력을 흐리는 것은 또 없습니다.

    case by case, person by person으로 봐야 하지요.

    구원이라는 것이 참 그 의미를 전하기가 어려운 것이 이성이나 말로는 정확한 그 의미의 전달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판단을 할 때, 자신이 경험한 바에 바탕하여 판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인식밖에 있는 부분, 특히 이성으로 설명되어지기 어려운 부분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뿐더러, 자신이 모르는 것은 배척하고 공격하는 인간의 본능상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를 어떤 삶이나 생활의 일부분, 세상살이 하는 데 있어 도움을 받는 어떤 인간의 고위의식의 한 형태의 사회적 현상이라고 한정하고, 예수님을 구도자 내지 천주교나 기독교라는 한가지 종교를 창시한 한 인간이라고 한정해 버린다면 윗글에서 말씀하신 고등학교 윤리책의 다분히 모더니즘적인 평가가 가능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재로 천주교건 개신교건 크리스천들이 실행해야할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실행"해야할" 이라는 말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때 그 분은 의인 즉 의로운 사람을 부르려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 즉 죄를 지은 사람을 부르러왔다고 하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회개하기 전 창녀였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세금을 계산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유태땅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세리는 유대땅에서 세율을 정하여 로마에 바칠 조공의 양을 결정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시 유다인들에게서 거의 공공의 적으로 멸신받고 업신여겨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재산은 넉넉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유다는 열혈당원이었습니다. 열혈당원은 로마에 반기를 든 일종의 유대인 지하조직입니다. 혁명에 의한 탈로마를 꿈꾸는 과격분자들이었지요.

    창녀라는 직업이 떳떳합니까? 사람들의 피를 쪽쪽 빨아 로마에 바치게 하는 세리들이 사랑받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과격분자는 손가락질 당하기 일 수 이며, 하물여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차별을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크건 적건 죄를 짓고 삽니다. 가슴을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죄를 한번도 짓지 않고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앞으로 죽는 순간까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아마 성인이 된다고 하여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 죄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용서하려 주시려고,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복음 즉 믿음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구원은 바로 예수님을 이 세계의 창조주이신 절대자를 인식하고 믿는가, 그리고, 그 절대자에 반하여 지은 죄가 있음을 깨닫고, 그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는 창조주의 "외"아들 예수님을 나와 세상의 구원자로서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분법으로 너와 나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와 나의 구별을 없애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지요.
    천주교에는 성체성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떼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니라"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흘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체라는 것인 조그마한 전병입니다. 맛도 별로 없습니다. 누룩을 넣어 발효도 안시킨 전병입니다.그런데 이것을 당신의 몸이라 하시고 받아 먹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자 즉 믿는 사람들은 아멘(진실로)이라고 응답합니다. 잔에 든 것은 포도주입니다. 이 것을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빵과 포도주는 사제에 의해 축성되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실수하면서 삽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여도 실수하고 배반하고 죄를 짓기 쉽기 때문에 나약한 인간의 몸을 취하여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인간의 나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과 피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먹었다는 것은 받아 먹은 자들이 모두 한 몸이 되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피가 섞이지 않은 옆사람이 내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지요.

    내 형제자매를 우리가 어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저 사람은 내 마음에 들고, 저 사람은 내 마음에 들지 않고라는 판단 자체도 아예 하지 말라 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을 아끼듯이 사랑하라 하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복음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우는 어디있느냐고 말이죠. 나만 구원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내 형제, 내 부모, 내 이웃, 내 스승, 내 친구들은 그냥 어둠속에 놔둘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 방법론적인 문제들에 있어 세련되지 못한 인간의 행동들이 아직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께 반감을 살 여지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재로도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일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원치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벌받기를 원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심하기를 원하시고, 회심하면 과거의 죄를 또다시 용서해 주십니다.

    베드로가 여쭈었습니다. 주님 도대체 몇번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일곱번씩 일흔번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이성적인)" 판단으로 한~ 7번 정도면 많이 용서해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일곱번씩 일흔번을 용서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받을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한 잘못을 용서해 줄 수가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모든 선함을 예수님께서는 탄생부터 삶, 죽음에 이르기까지 직접 몸소 보여주십니다.
    마굿간이라는 천하디 천한 장소, 하층민에 속했던 목수의 아들, 복음을 전하는 공생활중에는 field나 yard에서 제자들과 함께 주무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혐오했던 세리, 창녀,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셨죠. 단순히 어떤 이성적인 논리체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몸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말입니다.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잘 나서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죄인이고 못났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는 사람들의 생활이나 삶을 보고 교회는 이렇다 저렇다로 단정하진 말아 주십시요. 그건 스스로 구원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자신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판단의 죄를 짓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사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고 끊임없이 단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의 도움과 은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에서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말로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크게 한번 실수하고는 사랑의 매를 맞고는 하느님께로 가기 시작했습니다만, 편하고 좋을 때 하느님을 찾게 되면 하느님께서도 얼마나 사랑해주시고 복을 내리지 않으시겠읍니까?

    저는 동양학과 관련된 학문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크고 넓게 뻗어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힘을 돋워주며 먹고 마실 것을 주면서 이리로 저리로 가라고 도와주는 길과 구불구불하고 좁으며 갈랫길도 많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정표를 잘못 세워놓은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그 크고 넓은 길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희생해가면서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 길을 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면서 말이죠.

    혹 제 말중에 기분을 얹짢게 하거나 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용서를 청하고, 주님께서 당신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평화를 빕니다. 아멘~

    Reply
    1. NoSyu

      반갑습니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너무 긴 덧글에 첫 문장을 보고서 스팸 덧글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흔히 기독교인들이 말씀 전파 혹은 선교활동을 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고 몇 번 그런 덧글을 보았기에
      이 글도 그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어느 한 가지 분명한 사실, 반박할 수 없는 얘기를 처음 꺼낸 후 여러가지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 수 많은 말을 하나하나 들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며 논쟁하는 것은 참으로 힘듭니다.
      그렇기에 처음에 들었던 분명한 사실 때문에 뒤의 말도 그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인지라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잠시나마 오해했던 점 사과드립니다.

      많은 부분을 길게 적었지만 답글이 짧은 점도 사과드립니다.

      저 역시 분명 성경을 배울 때 예수님은 원죄를 지은 사람을 부르러 왔다고 배웠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비판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하나.

      교회 혹은 성당을 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고 싶은 것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전 저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예수님의 차별없는 사랑을 실천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선교 활동을 하는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예수님을 닮기 위해 교회에 나오라는 말보다는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죄인이고 못났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 얘기합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아
      예수님의 그 헌신적인 사랑과 감동을 배우는 자로서 모범이 되지 못해
      다른이에게 예수님의 본모습까지 흐리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사탄이니 하는 것이었기에 위 본문에 적었습니다.
      최근에도 청와대에 근무하는 한 목회자가 시청 앞에 나온 사람들을 보고 사탄이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왜 그들은 그에게 사랑해야 할 이웃이 아니라 사탄이여야하는지…

      처음에 말씀하셨듯이 싸잡아 보는 것은 분별력을 흐리게합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 자들의 공통된 것들과 그들의 대표성을 생각한다면 아쉽게도 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습니다.

      동양학을 전공하셨군요.
      저는 비록 동양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학교가 학교이다보니 그에 관련해서 배움을 얻고 있습니다.
      저랑 생각이 다르시군요.
      전 전자와 같은 길을 좋아합니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은 편하고 감사함을 느끼지만,
      난감한 상황에 빠지는 그런 길도 좋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거기서는 내가 선택하는 자유가 있고
      한 방향만 보지 않고 여러 방향을 살필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정말 좋아합니다.
      특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을 볼 때마다
      그의 무한한 사랑을 느낍니다.
      저도 그러한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느끼게 할 수 있을 정도의
      하다못해 모든 자들이 아닌 일부의 사람에게라도 느끼게 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사랑을 얘기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길게 저의 물음에 답해주셨는데 여기에 짧은 덧글과 공감하지 못한다는 뜻을 밝혀 죄송합니다.
      밤이 깊었네요.
      좋은 꿈 꾸시고 내일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Reply
  5. ㅇㅇ

    고등학교 윤리 선생부터가 일단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Reply
    1. NoSyu

      반갑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그리 좋은 시각을 가지지 않았던 듯…
      그래도 나름 공감이 갔던 얘기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성자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는 사람을 보고 해석한 것일지라도..;;;;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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