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이야기

By | 2012/04/08

  족보. 사전상 의미는 한 족속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밝혀 놓은 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꼭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 있어 족보란 지금까지 출제된 시험 문제지를 뜻합니다. 유명하게는 대학수학능력시험, 각종 고시 출제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좁게는 해당 과목, 해당 선생/교수의 출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출제 문제는 학생들이 해당 시험을 준비함에 있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해당 시험의 성격을 알 수 있고, 거기에 맞춰 준비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출제 문제 정보가 없다면 학생들은 교과서나 교재 등 다양한 측면에 있어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기에 높은 점수를 얻기가 힘듭니다.

 

이 얘기를 갑자기 하게 된 이유는 최근 제 모교에서 한 동아리/학회가 시험 족보를 그 학회 안에서만 공유하고 있어 그 속에 있는 사람은 적은 노력에도 좋은 점수를 얻는 반면 그 학회 밖의 사람은 이를 얻지 못하기에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는 성토의 말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학기 중에 치르는 각종 시험의 기출문제와 정답을 모아놓은 ‘족보’를 두고 학생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 대학 동아리가 족보를 회원들끼리만 공유하는 것을 두고 "공정한 경쟁을 해친다."는 의견과 "정보 수집 노력의 결과"라는 의견이 맞서고 있는 것.
특정그룹만 공유 ‘족보’ 학점경쟁이 빚은 ‘족쇄’

 

  그러하여 제 얘기를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족보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그 때 학원을 다녔는데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에 학원에서 그간 기출문제라며 복사본을 나눠주었습니다. 살펴보니 중학교에서 저를 가르쳤던 선생님의 기출 문제가 있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습니다. 그 때 당시에는 문제지가 하나 더 늘었다 생각하고 풀었기에 족보를 크게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학원에서 족보를 받은 듯싶습니다. 하지만 그 때 재미있던 것이 인터넷에 있었습니다. 바로 족보 공유 사이트였습니다. 해당 사이트에서는 전국의 모든 중고등학교의 시험 출제 문제들이 올라왔고, 이를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그간 학교 선생님들의 기출 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고 시험 준비를 함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대학교를 들어가서는 족보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OT를 참석하지 않아 선배, 동기들을 잘 알지 못하였기에 족보나 기타 정보를 얻기 힘들었습니다. 다만, 일반물리학과 미적분학처럼 신입생 공통 과목의 경우 기숙사 룸메이트를 통해서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공 과목에 있어서는 복학 이후라 동아리에 가입하고 친구가 생기면서 족보를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과목에 족보가 있던 것이 아니었기에 있는 것은 거기에 맞추어 공부하고 없는 것은 과목 전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KAIST에서 오신 교수님 수업의 경우 noah라는 KAIST 전산학과 수업 홈페이지를 기웃거리며 찾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기들로부터 얻은 족보를 기반으로 해서 한 과목의 경우 2일 정도 기말고사를 준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적은 노력으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기에 족보의 위력이라는게 참으로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족보라는 것이 있으면 학생들이 적은 노력으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족보’라는 것이 그러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일까요? 이는 아마도 시험 출제자가 관성적으로 시험을 출제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는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이름의 수업일지라도 각 선생/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은 다릅니다. 그리고 질문하는 형식도 다릅니다. 그러하기에 학생들이 이러한 성향을 파악하여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면 높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족보가 너무 큰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어 난감합니다. 그것은 바로 족보와 시험이 그대로 똑같이 나오는 경우에 있어서입니다. 정말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나오게 되는 경우 답을 미리 준비한대로 풀 수 있기에 아무래도 불공평한 경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시험이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아마 저는 시험이 있을 때마다 족보를 찾을 것입니다. 이는 앞에 얘기한 것처럼 설령 시험이 족보 그대로 출제되지 않더라도 출제자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정보 소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족보가 공개되지 않거나 혹은 몇몇 사람들에게서만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응하는 사람들이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공개된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족보 하면 생각나는 한 교수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냈던 시험 문제를 전부 다 인터넷에 공개하고 이를 수업 시간에 알려준다. 그럼에도 시험을 내고 점수 분포를 확인하면 Normal 분포를 따르는 것을 언제나 보게 된다. 그러니 족보를 공개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이 무어 있겠는가?

 

PS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족보라는 것을 얻을 때 너무 힘들었던 경험이 많아 제 블로그에 오는 사람들은 편하게 이를 얻게 하고자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하지만 시험지를 다짜고짜 올리면 저작권 등의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제가 푼 숙제를 올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그래도 제출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 전부 비공개글로 돌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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